도시탐사 워크숍 #베를린_2 베를린 두 번째 워크숍은 참석자 A님의 카스텔라 기부로 화기애애하게 시작했습니다. B님은 베를린 풍경을 직접 그린 책갈피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워크숍이 무르익을수록 마블로켓 워크숍을 찾아오시는 분들의 따듯함과 호기심, 다재다능함에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다과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어디를 여행하고 싶고, 어디에서 살아보고 싶은 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후쿠오카의 정겨움을 좋아하는 분, 해먹 튜브를 들고 언제든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이태리 남부에서 살고 싶다는 분, 멜버른에 살고 싶다는 분, 멜버른보다 서호주 남쪽의 올버니가 더 좋다는 분, 캐나다 동쪽 끝 포고 아일랜드, 지적 아우라가 있는 베를린까지 다양한 곳이 등장했습니다. 여행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마련이죠. 그곳이 어디든 도시의 매력은 다양하고 끝이 없으니까요.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복기하며 베를린의 건축 이야기로 두 번째 워크숍의 문을 열었습니다. 베를린의 지적 매력은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지점에서 출발하죠. 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은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폭격의 흔적을 보존했어요. 그 외에도 집단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전쟁의 공포를 체감할 수 있는 공간, 평화와 화해를 다짐하는 조형물을 만들었습니다. 베를린 곳곳에서 쉽게, 많이 마주칠 수 있어요.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 말에 벙커를 지어 은둔했죠. 현재 히틀러의 벙커는 안내 표지판만 있을 뿐이지만, 8미터 지하에 4미터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 옹벽으로 지어졌다고 해요. 히틀러는 패전 이후 1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배상금, 경제 공황 등의 혼란을 틈타 나치당을 키우며 총리의 자리에 오르죠. 1933년 대통령 사후에는 총리와 대통령 직을 겸한 총통이 되면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기 시작했고요. 히틀러 벙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합법적인 절차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어요. 그의 권력이 확장될 수 있었던 데는 선전대장 괴벨스의 역할이 컸고요. 괴벨스는 하이델베르크 인문학 박사인 엘리트였어요. 나치즘의 광신도가 되면서 히틀러를 메시아적 구원자로 선동하는 데 앞장섰어요. 미디어가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죠. 괴벨스는 히틀러와 나치즘에 반대하는 언어, 예술, 미디어, 문화를 완전 통제하고 장악했어요. 독일은 하켄크로츠의 깃발로 뒤덮이고 군대와 경찰은 히틀러를 추앙하는 경례를 하죠. 괴벨스와 관련해서 첫 번째 소개할 건축은 바벨광장에 위치하고 있어요. 훔볼트 대학 맞은편, 오페라 하우스 옆 바벨 광장에는 지하 도서관이 있어요. 나치즘에 위배되는 학자와 작가들의 책 2만 권이 불태워진 자리예요. 마르크스, 프로이트, 카프카, 아인슈타인, 에밀졸라 등의 책이 화형식에 처해졌죠. 이스라엘출신의 조각가, 미하 올만은 2만여 권의 책을 소장할 수 있는 텅 빈 도서관을 지하에 지었어요. 텅 빈 도서관의 불빛은 밤의 광장을 밝히고 있어요. 바벨광장 두 번째 건축물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비예요. 같은 형태, 같은 크기의 추모비 2,711개가 격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죠. 다만 추모비의 높이만은 달라서 추모비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른 키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추모비들이 거대하게 다가와요. 홀로코스트 추모비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는 ‘썩은 이’로 불리는 건물이에요. 프로이센 시대부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교회는 영국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건물의 상단부가 크게 훼손됐어요. 재건을 맡은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은 이 건물을 철거할 계획이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남겨졌고요, 대신 그 옆에 8각형의 예배당과 6각형 종탑을 세웠어요. 예배당의 외관은 평범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푸른빛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말문이 막혀요. 황금 예수상은 신성한 분위기를 더하죠.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베를린에서는 곳곳에 장벽의 흔적을 볼 수 있어요. 장벽의 기존 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은 베를린 장벽 기념관, 예술 벽화의 형태로 남아있는 곳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 그리고 ‘체크포인트 찰리’라는 재현된 곳이에요. 이스트사이드갤러리 패전 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4개국에 의해 분할통치를 받게 되죠. 서방 국가들은 소련 영역에 있는 베를린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동독 속의 섬처럼 베를린 역시 4개 국에 의해 분할 통치를 받게 되죠.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독은 1961년부터 155km의 긴 장벽을 쌓기 시작해요. 서베를린 전체를 둘러싼 장벽은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지, 이웃을 갈라놓았고,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어요. 공원처럼 개방된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서 이별의 비극을 볼 수 있어요. 쇠파이프는 장벽이 서있던 장소를 표시하고 있고요. 생고기를 써는 듯한 섬뜩한 그라피티는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죠. 탐사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픔과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표현을 하는 작가의 용기와 그 표현을 허용하는 시민들의 용기라고 할까요? 베를린 장벽 기념관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공포의 지형학은 독일제국 총독부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 본부가 있었던 자리예요. 수많은 사진, 증언, 영상으로 나치즘의 활동을 박제해 두었죠. 히틀러 한 사람을 지목하지 않고, 나치즘이 어떻게 작동될 수 있었는지 그 정황을 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이 인상적이었어요. 적나라하고 불편한 자료들을 유심히 보는 시민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공포의 지형학 모두들 ‘노이에 바헤’의 건축 설계에 탄복했어요. 노이에 바헤는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던 오랜 건축물이에요. 히틀러의 군대들이 집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추모의 공간으로 원래의 목적을 회복했죠. 1800년대 지어진 웅장한 건물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을 의심하게 돼요. 검은 공간 안에는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하나가 중앙에 놓여있거든요.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라는 작품을 4배로 확대한 작품이에요. 조각상 바로 위로 천장에 구멍이 있어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조각상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이죠. 낙엽이 흩날리다가 노이에 바헤의 열린 창으로 들어오기도 하고요. 햇빛을 받고 있어도, 비에 젖어 있어도 숙연해지는 공간이에요. 노이에 바헤 마지막은 유대인 박물관이에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인 ‘리베스킨트’에 의해 설계된 공간인데요. 설계도 그대로 건축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곳이라고 해요. 이 공간에 들어서면 내부가 기울어진 직선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게 되죠. 이동 통로도 기울어진 경사면이고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축들도 모두 서로 다른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요. 외부를 볼 수 있는 창문은 대각선이고요. 유대인 박물관 유대인 박물관 내부 홀로코스트 타워에 들어가려면 육중한 철문을 밀어야 해요. 끼익 금속 소리에 긴장감이 배가 되죠. 어떤 장신도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는 사다리, 천장 위로 뚫려 있는 사각의 창을 통해 간신히 햇살이 들어오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태연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망고문을 불러일으키고요. 공간 설계만으로 당시 유대인들의 공포감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거죠. 망명의 공원은 위험 경고가 적혀 있는 곳이에요. 유리문을 밀고 망명의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평형감각이 무너져요. 내가 똑바로 서있는 건지, 기둥이 기울어져 있는 건지,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바닥을 딛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이렇게 어지러울 일인지 당황하게 되죠. 어딘가 정착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의 삶을 설계한 공간이에요. 망명의 공원 정말 발을 내딛기 힘든 곳은 수많은 주철 조각의 얼굴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공간이에요. 공포에 질려 있는 표정들을 밟을 때의 난감함과 죄책감, 그리고 밟을 때마다 공간을 울리는 ‘철의 비명’은 걷는 체험만으로도 공포와 비극에 공명하게 되죠. 바쁜 일상을 살아가며 역사의식을 갖기는 쉽지 않아요. 그러나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일상 속에 역사의식의 공간들을 품고 있어요. 베를린을 성숙한 도시로 보게 되는 이유라고 할까요?